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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역사

[역사]그레이트 짐바브웨

개  요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후기 철기 시절 짐바브웨 왕국의 수도로 사용된 도시였습니다.

4 세기 이래로 사람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지만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된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후 약 400년 동안 한 왕국의 수도로서 사용되다가 15 세기에 버려졌습니다.

폐허로 변한 이 도시의 흔적은  현재 짐바브웨 남동쪽에 있는 마스 빙고와 무티 릭웨 호수 근처에 위치해있습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면적은 약 2.79평방 마일이며, 인구는 최대 18,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화려한 석조 도시는 짐바브웨 대왕의 권위를 대변해주었으며 왕궁을 포함했습니다.

이 도시의 역사적 건축물은 쇼나 족의 조상들이 건축을 담당했으며, 도시를 보호하는 높은 성벽은 몰타르 없이 오직 커다란 바위를

짜맞추어 세워졌습니다.


건축과 성장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오늘날 쇼나족의 조상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쇼나족의 언어로 짐바브웨라는 말은 "숭배받는 일가" 또는 "석조 가옥"을 의미했으며, 석조가옥이나 성채는 곧 권력을 으미했습니다.

이러한 석조 도시 혹은 마을 유적은 짐바브웨아 모잠비크 일대, 남아공까지 약 200여개가 존재하며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이 가장 큰 규모입니다.

 

도시 건설은 11 세기에 시작되어 3 세기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왕국인 1200년 부터 1500년까지 번성했으며, 이들은 농업, 목축업, 해외무역을 통해 큰 번성을 누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교역품은 금과 상아, 구리였습니다. 쇼나 족은 금, 상아, 구리 등을 수출하고 아라비아, 페리스아, 인도  등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유리구슬 같은 사치품을 수입했습니다.

이는 짐바브웨 유적지에서 중국제 도자기 파편, 페르시아제 파이앙스 도자기 파편 등이 발굴됨으로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성벽입니다. 이 성벽은 높이가 거의 10미터에 이르며, 길이는 250미터에 달합니다. 앞서 서술한대로 돌을 부착해주는 몰타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돌을 다듬어 이어 붙여서 축조했다는데 이 성벽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총 3단계에 걸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힐 컴플렉스, 밸리 컴플렉스 및 그레이트 엔클로저 인데

도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9 세기에서 13 세기 사이에 사용 된 힐 컴플렉스 지역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최대 18,00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10,000명에도 미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유적지의  발견

이 도시가 언제 버려졌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1513 년에서 1515 년 사이에이 지역을 여행 한 최초의 유럽인 안토니오 페르난데스 (Antonio Fernandes)는 현재 짐바브웨를 방문했지만 그의 보고서에서 도시의 폐허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부 상인들은 16 세기 초에 존재했던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탐험가인 Diogo Alcacova는 1506 년에 포르투갈의 왕에게 쓴 편지에서 도시의 폐허가 우칼랑가 왕국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일계 미국인 사냥꾼이자 상인 인 아담 렌더가 사냥 여행 중에 1867년에 폐허가 된 도시를 발견하고 1871년 독일의 탐험가 칼 마우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우흐는 도시가 예루살렘에있는 셰바궁전의 여왕을 따라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 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랜달은 1905 년부터 1906 년까지 짐바브웨 왕국의 첫 발굴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영국 고고학자 게르트 루드 캔톤 톰슨은  1929 년에 12 일 동안이 지역을 발굴했으며,

이 지역에서 발견 된 발견물, 인류학, 구전 전통 및 도자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고고학자들은 건축업자들이 쇼나 언어 중 하나를 사용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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