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과 역사

[인물]장영실(蔣英實) 이야기

장영실은 조선 세종때의 과학자, 천문학자이자 기술자로 양부일구, 자격루, 혼천의 등을 개발한 인물 입니다.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공직 임명기록을 보면 1442년~1443년에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역사학자들은 장영실의 출생연도가 1385년 ~ 139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망연도 또한 세종의 가마가 부러지는 사건으로 파직된 해가 1442년인데

이후 기록이 없어 1450년 전후를 사망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관직에의 등장

장영실은 기녀의 소생으로 동래현의 관노로 지내고 있었는데 동래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수로를 만들고 수차를 이용해 먼 곳에 있는 강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하여 가뭄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 공로가 세종에게 보고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태종실록에서도 장영실이 기술력을 인정받아 보호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등장연도 또한 미상입니다.

세종 4년인 1421년 세종의 명령으로 장영실은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웠으며, 귀국 후에는 천문기기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1423년

면천되었고, 종5품 공직인 상의원(尙衣院)별좌에 임명되었습니다.

불과 1년 후에는 정5품 행사직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실력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세종의 정치 철학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세종의 명령으로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의 밑에서 천문기구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격루(1434년 개발), 옥루(1438년 개발)을 개발했으며,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등의  제작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에 오르게 됩니다.

 

파직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직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1442년 3월(세종 24년) 세종이 이천으로 온천욕을 다녀오는 길에 어가(왕이 타는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정에서는 장영실을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합니다.

장영실의 실력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형벌을 2단계 감형해주기는 했지만,

관직에서는 파직당하고, 이후 장영실의 행적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장영실의 발명품

 

자격루(自擊漏)

물의 증감을 통해 일정량의 물이 모이면 쇠구슬을 굴려

일정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일종의 물시계

흐린 날이나 밤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없는 해시계와는

달리 하루 종일 시간을 알려주었기에 조선시대에는 국가표준 시계로 사용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의 일종으로 오목한 화로 크기의 둥근 가마솥 시계판에

24절기를 표현하기 위해 13선의 위선을 그어놓은 장치

그림자 바늘은 한양에서 사용하던 북극출지 기준 37도 20분에 맞춰 비스듬이 꽂아놓았다.

이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조선 말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궁궐, 관공서, 사대부 가옥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옥루(玉漏)

438년(세종 20)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천상(天象)자동물시계로

장영실이 대호군에 오른 후 세종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영실은 이를 만들기 위해 송(宋)·원(元)시대의 모든 자동물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리비아 물시계들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였으며,

독착적인 천상시계장치(天象時計)를 완성했다.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는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필요했지만, 옥룬,ㄴ

인력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작동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