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포츠와 문화

[인물]프란츠 베켄바워 - 리베로의 창시자

프란츠 베켄바워(독일어: Franz Anton Beckenbauer)는 현대 축구에서 리베로(Libero)라는 역할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그는 자신의 클럽팀인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국가대표팀에서 전설로 추앙받는 선수 중 한명입니다.

클럽 선수로는 리그 우승은 물론 유럽 클럽대항전을 재패했으며, 대표팀에서는 유로대회와 월드컵을 모두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특히 월드컵에서는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인물입니다.

 

선수생활의 시작 - 클럽 경력

프란츠 베켄바워는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5년 9월에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6세가 되던 해에 SC 1906 뮌헨이라는 팀에서 유스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9세 때는 바이에른 뮌헨 유스로 옮겼으며, 이 때부터 성인선수까지 18년간 뮌헨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19세이던 1964년 뮌헨 1군에 데뷔하였으며, 데뷔 당시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 속해있던 팀은 이듬해 1부리그로 승격됩니다.

 

당시 뮌헨은 1966년과 1967년 시즌 DFB 포칼에서 우승하며 강팀의 기틀을 다져갔으며, 1968-69시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하며 유럽에서도 경쟁력있는 강팀이 되었습니다. 베켄바워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14시즌(1부리그 12시즌)을 뛰며, 리그와 컵 대회를 합쳐 584경기 출전, 75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간동안 팀음 리그 우승 4회 DFB 포칼(컵대회) 4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으며, 이는 리베로라는 역할로 대변되었습니다. 

 

국가대표 경력

베켄바워는 20세이던 1965년 처음으로 독일 대표팀에 발탁되었습니다. 1965년 A매치에서 3경기를 뛴 그는 1966년부터는 대표팀에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1966년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팀이 치른 5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뛰었으며, 스위스와의 첫 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습니다. 준결승전에서는 소련을 상대로 1득점, 1어시스트를 기록하여 21세의 나이로 서독의 결승 진출을 이끈 선수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4로 패배,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베켄바워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보비 찰튼을 1:1로 마크하면서 그를 봉쇄하는데 성공하여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정작 본인은 "보비 찰튼이 나보다 조금 더 뛰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졌다."라는 발언을 하며 겸손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대회에서 베켄바워는 4득점으로 득점 3위에 올랐는데, 공격수가 아닌 선수로는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습니다.

1970년 월드컵에서 베켄바워는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으며, 준결승전에서 쇄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붕대를 맨 채로 연장전까지 소화하는 투혼을 보여주었지만 3-4로 패배하며 3위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972년, 베켄바워는 마침내 대표팀에서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립니다. 그해 벨기에에서 열린 유러피언 챔피언십(현재 

EUFA 유로)에 참가한 독일대표팀은 결승전에서 소련을 3-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74년 월드컵은 아마도 그의 대표팀 커리어에서 가장 뜻깊은 대회였을 것입니다. 

자국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은 1차 조별예선과 2차 결승리그에서 6경기 5승 1패로 무난히 결승에 올랐습니다.

당시 이른바 '토탈사커'라 불리는 전술로 세계 축구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네덜란드를 결승에서 맞아 전반 2분 페널티킥으로 실점했지만 브라이트너가 25분 페널티킥으로 동점을 만들고 '폭격기' 게르트 뮐러가 43분 추가골을 득점하면서 2-1로 무난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독일대표팀은 유러피언 챔피언십과 월드컵을 연속 우승한 최초의 국가로 기록되었습니다.

 

1976년 유러피언 챔피업십에서는 결승에 올라 대회 2연패를 노렸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이듬해인 1977년 베켄바워는 31세의 나이에 대표팀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의 대표팀에서의 기록은 103경기 출전 14득점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Xq8ntNkxw

프란츠 베켄바워 스페셜 영상

업적

베켄바워는 선수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리그에서는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12회나 선정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뮌헨과 함께 처음 1부리그에 올라온 1965-66시즌부터 분데스리가 경력을 끝내고 미국으로 건너간 1976-77시즌까지 단 한해도 빼놓지 않고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베켄바워는 데뷔시즌부터 은퇴시즌까지 언제나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이 외에 발롱도르 2회(1972년, 1976년), 독일 올해의 선수 4회(1966년, 1968년, 1974년 1976년)를 수상했습니다.

 

대표팀에서는 3번 출전한 월드컵에서 모두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1966년 월드컵에서는 영 플레이어상과 함께 브론즈슈를 수상했습니다.

 

무엇보다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리베로(Libero)'라는 역할을 창시한 것일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축구에서 수비수, 특히 중앙수비수는 공격시 자기 진영 깊숙히 자리 잡고 상대팀의 역습에 대비하는 것이 전형적인 팀 전술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덩치가 크고 힘이 좋으며 공중볼을 따낼 수 있게 키가 큰 선수들이 선호되었습니다.

 

베켄바워는 중앙수비수이면서도 공격 전환시 공간이 생기면 공을 끌고 나와 공격에 가담했으며. 뛰어난 볼 컨트롤로 공을 소유하면서 찬수를 만드는 능력이 우수했습니다. 이는 1966년까지만 해도 주로 미드필더로 뛰면서 익힌 공격 능력과 그만의 뛰어난 수비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