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과 역사

[인물]다산 정약용의 개혁과 그 의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은 조선의 유학자이자, 실학자로 조선 중기에 조선왕조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종 개혁사상을 조선 정계에 불어넣은 인물 입니다.

 

그는 정치, 경제, 토지 등 여러 방면에서 조선에 개혁을 가져오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기득권세력의 반대에 막혀 개혁안으로만 그친 것도 많습니다.

 

오늘은 정약용이 추구하고자 했던 개혁안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 의정부(議政府) 기능 강화

정약용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비변사(備邊司)가 장악하던 군국기무 처리 기능을 의정부로 되돌리고 의정부에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하여

의정부가 관료기구의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 개편을 주장했습니다.

왕의 직속기관인 의정부를 활용해서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행정기관인 육조(六曹)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강화하자 했던 것입니다.

 

2. 과거제 개혁

조선시대에 과거제도는 관료 사회 진출을 위해 필히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들어서 과거시험 횟수가 많아지고 합격자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유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정약용은 과거시험 중 식년시를 제외한 모든 부정기 시험을 폐지하고 과거 급제자의

숫자도 줄였습니다. 이에 더해 시험 과목수도 대폭 늘려 다양한 지식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3. 토지 개혁

정약용은 그의 저서 경세유표에서 “정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전국의 토지를 9할로 나눈 다음 1할은 공전으로 조세 확충을 위해 두고

나머지 8할은 농민에게 배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8할의 토지 또한 30가구를 1여로 묶고 여민(閭民)은 공동노동을 통해서 생산과 수확을 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여민이 선출한 여장(閭長)은 생산작업을 분담시키며, 일역부(日役簿)를 만들어 노동량을 기록,

최종 생산물을 가족별로 투하된 노동량만큼 배분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즉, 공동생산을 추진하지만, 소비는 가족 단위로 하는 것으로 제안한 셈 입니다.

이를 그는 “여전제”라고 불렀습니다.

 

나아가 토지를 이용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 공, 상의 토지 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구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상인과 수공업자는 독립적으로 여전제와 사회적 분업관계를 이루도록 하였고, 사족의 경우 직업을 바꾸어 농사에 종사하거나

그 밖의 생산활동, 즉 상업·수공업·교육 등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사(士)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했습니다.

 

4. 상업 개혁

18세기 이후 생겨난 특권 상업과 매점 상업제도의 철폐를 주장했습니다.

이들 상업 주체가 독점적인 매입권한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등의 폐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상업분야에서의 세수 증대를 위해 독럽적으로 세금징수 업무를 담당할 세과사(稅課司)나 독세사(督稅司)

설치를 주장했고 전환서(典圜署)를 설치해 화폐의 관리체계를 일원화해 화폐의 품질과 가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5. 신분제 개혁

정약용은 모든 신민을 사·농·공·상·포·목·우·빈·주(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9직(九職)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정약용이 직역을 기존의 신분 파악에서 사회 분업에 따른 직능 파악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개혁의 의미

정약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조선 중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 사회, 경제 전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은 양반과 세도가의 전횡을 없애고 평민(대부분 농민)의 위하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의 개혁에는 기본적으로 왕권 강화와 왕도정치( 王道政治)로의 복귀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정책이 일견 그를 서민의 구세주로 돋보이게 해주지만, 그 또한 남인 출신이 양반가문의 자제로

왕을 앞세운 양반제도의 붕괴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도정치로인한 부작용이 한계에 달한 18세기 말 ~ 19세기 초 조선 사회에서,

세도정치가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조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왕도정치 이념을 구현해 국태민안(安)이라는 이상성 상황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집권층에 대해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질서의 강화에 협조하고, 아래로는

애민(愛民)·교민(敎民)·양민(養民)·휼민(恤民)하는 목민지도(牧民之道)를 확립, 선진 시대 이래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이었던 민본(民本)의 의식을 실천을 위해 개혁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왕도정치  (王道政治)

맹자의 정치 사상.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 정치(覇道政治)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도덕적 교화를 통해서 순리대로 정치를 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는 인(仁)을 가장하여 실제로는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을 패도라 하고, 덕으로 어진 정치를 실시하는 것을 왕도라 하였는데,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사람들은 진심으로 따르게 되므로,

덕에 의한 왕도정치 해야 한다고 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반응형